한상덕 논설위원

한상덕 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얼마 전 장인 어르신이 팔순 연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다. 슬프지 않고 안타깝지 않은 이별은 없다. 우리 장인어르신의 별세 역시 가슴이 아프고 슬프기만 하다. 아무리 슬퍼다 해도 내 슬픔이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내의 슬픔에 견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일심동체 부부로서 함께 느껴야만 하는 그 허전함에는 차이가 없다. 미력하나마 내가 할 일이 하나 있다. 장모님을 위로하고 자책거리를 찾아 슬퍼하는 식구들을 달래는 일이다. 그러나 또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무정한 세월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장인어르신은 평소 건강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많이 하고, 몸에 좋다는 건 다 구해 드시려 했다. 두터운 동의보감 책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공부를 했고, 머리맡에는 언제나 장인어르신 당신께서 스스로 판단해서 구입해온 건강식품과 약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랬음에도 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 친정아버지께 언젠가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공부도 많이 하고 좋은 약은 다 드시는데도 왜 그리 건강에 문제가 많으세요?” 옳은 말이었다. 모순이었다. 그러나 장인어르신의 대답은 이 불효자식들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내가 이렇게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단다. 요놈들아.” 그리고는 평소 농담 삼아 딸들에게 문자를 보내곤 하셨다. “죽기 싫다. 불로초를 대령하라.”

내가 우리 장인어르신께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할 일은 어린 딸을 내게 시집보내주신 거였다. 결혼 당시, 무직에 서른셋 노총각이던 내게 스물다섯 살이던 대학 4학년짜리 딸내미를 내 사정에 따라 일찍 결혼을 시켜 주신 거였다. 결혼 전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하신 말씀이다. “꿈이 있는가? 있다면 끝까지 한 번 노력해 보시게. 그러나 그 꿈을 못 이룰 수도 있겠지. 못 이루면 어떤가?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다고 했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어도 괜찮아. 우리 딸 귀하게 키웠지만 손에 흙 묻혀 고생시킨다고 원망하지 않을 테니 잘 한 번 해 보시게.”

돌이켜보건대, 나는 쉰 한 살 이전까지 고정된 직장도 없었다. 그러니 고정된 수입도 없었다. 그 반생을 어쩔 수 없이 아내를 힘들게 했다. 장인 장모님을 슬프게 했다. 안타깝게 살아가는 그 고운 딸내미를 지켜보면서 사위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셨고 늘 지켜봐주셨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장인’ ‘장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엊그제 살아생전 장인어르신과 나누었던 문자 메시지를 한 번 열어보았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이며, 존재와 부재의 차이가 무엇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언젠가 아내 생일날 장인어르신과 나누었던 문자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장인 어르신, 장모님, 전화 드려도 안 받아 문자드립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곱고 착한 딸내미를 저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사위 올림” “고맙고 고맙네. 내가 감사할 따름이네. 항상 내외가 건강하고 웃고 살게나.”

엊그제 밥을 먹다가 아내가 울먹이며 툴툴댔다. 돌아가시면서 자식들한테 유훈이라도 한 마디씩 하고 돌아가셔야지, 어떻게 한 마디도 없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느냐고? 그렇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고 평소에 남겨놓은 유언은 셀 수도 없다. 그저 다 잊고 살았을 뿐이다. 다 무시하고 살았을 뿐이다. 아니, 그냥 잔소리처럼 듣고 넘겼을 뿐이다. 오늘 다시 문자들을 넘겨보자니 확인이 된다.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 하나만은 꼭 기억하련다. “웃고 살게나.”

오늘따라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이란 시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그 누가 말했던가, 한 치의 풀 같은 마음으로 (어찌) 봄볕 같은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느냐고.(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장인 어르신 돌아가신 후, 내가 갚을 수 있는 보답 하나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내 힘들게 하지 않고 그냥저냥 웃고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