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간혹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한다. 주로 평소에 잘 다니던 산책로를 걷지만 때론 다른 길을 택하기도 한다. 대문을 나서면서 내가 산책로를 정한다. 그러면 아내는 별 불만 없이 그 선택을 따른다. 지금까지의 ‘루틴’이다. 그러다 요즘엔 조금 변화를 주었다. 아내가 선택을 하도록 하고 내가 따르는 방식이다. 별 것 아니지만 이유가 있다. 결정권이 행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늦게나마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 선택권을 통해 아내가 자존감을 높이고 또 그것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웃자고 만든 유머 하나를 접한 적이 있다. 공처가 대회에서 1등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와 가장 공평하게 집안일을 나눠서 살아온 사람이라 강조했다. 잘잘한 일은 모두 아내가 맡아서 결정하고, 큰일은 남편인 자신이 결정해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단다. 그런데 육십 평생을 함께 살면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집안에 큰일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결정권은 아내에게 있었고 남편인 자신에게는 그동안 한 번도 결정권이 없었다는 의미다.

결정권자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힘을 가졌다. 책임을 진다. 성취감을 느낀다. 가정이나 조직에서 최종 결정은 힘의 무게중심에 있다. 결정을 주도한 사람은 결과에 부담을 가지긴 하지만 일을 이룬 다음 느끼게 될 성취감이나 행복감은 결정을 따른 사람보다 훨씬 높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거나 고집을 피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시 결정권은 자존감의 정도를 가늠하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된다.

자기 결정권은 인생의 주도권을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대입 수험생들이 희망하는 학과를 선택할 때 누군가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한 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아빠, 나 어디가?”라고 자신의 진로 선택권을 부모에게 맡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석사 박사 학위과정을 공부하는 연구생도 마찬가지다. “교수님, 저는 이러이러한 방면에 관심이 많아 이런 분야를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지요?” 이렇게 상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내용으로 논문을 써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제를 하나 정해주시지요.”라며 자기 결정권을 지도교수에게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훤히 보인다. 어떤 인생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논문을 쓸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중간에 쉽게 포기해버리고 누군가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 마침내 옥고를 완성해 낸다. 전자인 경우는 논문 주제를 정할 때 자기 결정권을 지도교수에게 맡긴 경우가 많고, 후자인 경우엔 자신이 선택한 경우가 많다. 전자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된다. 자기는 별로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지도교수가 종용해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후자는 원망할 대상이 없다. 자신이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원망할 대상이 밖에 있는 사람은 핑계를 대고 포기할 가능성이 크지만, 대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 극복해 낼 가능성이 크다.

내겐 제자들에게 학위 논문을 지도할 때 원칙이 있다. 요구 사항에 따른 순서가 있다. 스스로 관심 분야를 찾아내라. 선행 연구가 있는지 파악하라. 관련 자료를 수집･분석하라. 논문 목차를 작성하라. 논지 전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라. 가만히 보면 결정권이 전부 논문을 작성하는 학생에게 있다. 지도교수가 참견할 부분은 거의 논문이 완성되었을 즈음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점검을 하고 조언을 해야 하는 지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학생이 해결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논문 작성 과정에서 그릇의 크기가 드러나 보인다. 전도(前途)가 그려진다.

세상에 고통 없이 이뤄진 업적은 단 하나도 없다. 논문 역시 쌓고 허물기의 반복을 통해서 완성된다. 일주일 내내 연구를 했으면 성과가 보여야 옳다. 하지만 오히려 분량이 줄어드는 경우도 생긴다. 작성해 놓은 내용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렇다. 이 순간, 자기 결정권을 가진 자는 성(城)을 허물면서도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에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잖은 사람은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죽지 못해 사는 듯이 보인다. 역시 행복감은 자기 결정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걸 방증해 주는 대목이다.